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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진 단편연재소설] 나비의 새벽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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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서유진 작성일19-09-25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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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서유진남자의 사랑은 그 생활의 일부이지만 여자의 사랑은 그 전부다.―바이런
 
남자들은 걸신들린 듯 술잔을 들이켰다. 그들은 제일 덩치 큰 남자를 선배라 했고 나머지는 별명을 불렀다. 남자 둘은 뺀질이와 깐깐이, 장민수는 색시로 불렸다. 모두가 사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박의 고등학교 후배였다. 박은 고시에 청춘을 썩혀 버렸지만, 자부심을 잃지 않은 야심가였고, 부잣집 외동아들로 패거리의 물주였다. 후배들이 박의 만혼을 축하하고 신혼 재미가 어떠냐고 물었다. 이마 면적이 자꾸 넓어지는데 밤이 두렵지 않으냐는 둥, 전립선은 이상 없느냐는 둥, 선배를 놀려먹었다. 박이 더 늦기 전에 너희도 빨리 결혼을 서두르라고 하자,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결혼해? 귀한 공주님을 떠받들고 살려면 요게 필요한데, 하며 깐깐이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선배는 좋겠다, 부모 잘 만나 결혼도 하고."

  피부가 반들반들한 뺀질이도 빈정거렸다.

  "배 아프면 너희도 꼰대한테 논 몇 마지기 팔아 달래서 한 이 천 들고 가봐. 더 늙기 전에 캄보디아든 인도든 가서 데려와."

  박은 자신의 아내가 자그마치 스무 살이나 어리고 말도 잘 통하는 우리 조선 동포라며 행복해서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색시야, 넌 직장도 있으니 진짜 색시를 구해야 하지 않겠냐?"

  장민수가 싫어요, 돈으로는, 하다 박을 쳐다봤다. 박은 미간을 찡그리더니 딴청부리듯 옆에 앉은 뺀질이에게 말머리를 돌렸다.

  "아, 됐네요. 능력도 없으면서 처자식을 거느리는 건 죄악이야, 죄악."

  "인마 너, 내 아내 식당 일 시킨다고 내게 엿 먹이는 거야?"

  "그럴 리가. 난 돈도 없고, 돈 있으면 혼자 살지 결혼 안 해."

  "너희 같은 독신주의자가 나라 망치는 거야. 사내자식들이 구더기가 무서워 장 못 담근단 말이지? 이 떨거지들아, 그거 쓸데없으니 떼버려라."

  말 떨어지기 무섭게 박은 기다란 팔을 뻗어 맞은편에 앉은 뺀질이의 아랫도리를 우악스레 움켜잡았다가 놓았다.

  "사실은 찾는 중이야. 취향만 맞으면 누구라도 환영이야. 나 좋다고 쫓아다니는 여자 있어도 마음에 안 드는 걸 어째."

  깐깐이 남자의 말이었다. 유라의 눈에는 깐깐이가 자신의 외모를 과시하는 듯 보였다. 높게 곧은 콧대 위에 짙은 눈썹과 가늘게 올라간 눈초리가 쉬운 상대는 아닐 듯했다. 그에 비하면 맑은 눈을 가진 장민수는 너무 어리숙해 보였다.

  "실업수당 받으며 어떻게 살려고…."

  장민수가 말끝을 흐렸다. 유라는 그의 얼굴에 잔잔히 퍼지는 안도감을 놓치지 않았다. 박봉이나마 장민수 혼자만 어떤 공사에 다니는 정규직이었다.

  "취업이야 곧 되겠지. 난 수준만 맞으면 누구라도 오케이야. 전 남편의 자식까지 키워줄 수도 있어."

  박이 마시던 맥주잔을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인마, 네가 그만한 능력이 돼? 넌 이미 경제력을 가진 여자를 염두에 두고 있는 거잖아."

  "선배도 참, 그게 문제가 돼? 함께 전시회도 가고, 오페라도 보면서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여자면 좋잖아. 문화와 예술을 모르는 여자는 사양해."

  "자식아, 네가 무슨 예술가라고 똥폼을 잡아. 티켓 살 돈 없어 공짜 공연만 찾아다니는 주제에. 넌 자신을 착각하고 있어.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사르트르 그거 읽었어? 안 읽었지? 인터넷에서 문장 몇 줄 찾아 외워 보이면 여자들이 끔뻑 넘어가? 껍데기나 핥는 네 녀석이 참 안타깝다, 안타까워."

  박이 거친 숨을 토했다.

  이 대화에서 여자의 경제력이 결혼의 조건이라는 사실에 유라가 역겨운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색시야, 너도 기다리냐?"

  박이 장민수에게 다정스럽게 물었다.

  "나, 난, 여기서 다 말할 수 없어. 말해도 아, 아무도 이, 이해하지 못할 거야."

  "인마, 내가 벽창호냐, 응?"

  "사, 사랑하는… 여, 여자를 만나야 해."

  "자식, 갑자기 말은 왜 더듬어."

  "인마 원래 심각해지면 더듬잖아."

  뺀질이가 대답했다. 모두가 키득키득 웃었다.

  "우, 웃지 마. 오, 오다가다 만나더라도 서, 서로 눈을 마주쳐야 하고 사랑이 영글어야 겨, 결혼하지."

  웃음이 뚝 그쳤다.

  "색시야, 사랑은 살다 보면 생기는 거야. 요 가슴이 바로 사랑이 솟아나는 샘 아니냐. 샘물은 아무에게나 퍼주는 거야."

  유라는 덩치가 큰 박의 가슴 속에 있는 샘을 상상했다. 박이 휘파람을 길게 불며 좌중을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중국에 있는 아내 친구에게 전화가 왔더라. 거기서 고등학교 교사를 한다는데 한국에 오고 싶다고 하더군. 아내 하는 말이 걸작이야. 여기 오면 돈 벌 곳 많으니 일자리 찾아보겠다고 하더군. 그러니까 분발하라고!"

  박의 마지막 말은 울분 섞인 다짐 같았다.

  "돈이 최고라니, 서글프네요. 나는 이제 돈이 필요 없는데."

  진이의 말에 모두가 놀란 토끼처럼 귀를 세웠다.

  "돈 필요 없는 인간은 지구상에 없네요. 목숨을 포기하는 자라면 모를까."

  박이 무 자르듯 말했다. 진이는 살포시 웃으며 목걸이의 나비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못 마시는 술을 거푸 홀짝이더니 눈동자가 풀려 있었다.

  "이거 언니 할래요?"

  나비 펜던트를 목걸이 줄에서 떼어낸 진이는 탁자 위에 푹 꼬꾸라졌다. 잠들었는지 꼼짝하지 않았다. 유라가 어느 날 본 나비처럼, 찢어진 날개를 바르르 떨다가 영영 움직이지 않았던 나비처럼.  <계속>
소설가 서유진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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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